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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 이야기

garnishee 2024. 2. 8. 16:08


- 10월 (1) 『자금성 이야기』 청대의 역사를 거닐다 _이리에 요코 / 돌베개 쉽게 따라가는 자금성 가이드 1987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자금성(紫禁城)은 지상의 천궁(天宮)이라는 호칭이 붙어있다. 중국 북경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대부분 자금성을 찾는다고 한다. 엄청난 규모와 화려함이 장점이다. 이 책의 저자 이리에 요코는 장대한 역사의 드라마를 품고 있는 자금성이 단순히 그 규모와 외모로만 표현된다는 것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이 책은 자금성에 대한 단순한 소개를 나열하는 대신 그 안을 차근차근 누비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인문적 가이드서다. 이제는 고궁의 자리에 앉아 있는 자금성에서 관람객 한 사람 한 사람의 걸음을 따라가며 곁에서 조곤조곤 이야기 해주고 있다. 각각의 공간들이 어떤 의미를 담고 조성되었으며 실제로 그 안에서 무슨 일들이 벌어졌는지, 황제를 비롯해 주요한 역사적 인물들은 곳곳에서 어떤 생각을 했고 사건 전개의 동선은 어떠했는지를 설명해주고 있다. ‘세계의 중심’위에 장대한 권력 장치를 형상화 낸 자금성의 설계, 황제의 집무 겸 생활공간이었던 건청궁과 양심전의 간소한 듯 특이한 구조, 황후와 비빈들이 생활한 ‘동서 12궁’에 감돌던 평화와 긴장감을 들여다본다. ‘자금성’과 ‘청 제국’. 시공간의 교차로에서 읽어낸 중국 역사 자금성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살펴본다. 고대 중국에서는 천제가 거주하는 곳을 하늘의 중앙이자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 북극성으로 여겨 그 거성(居城)을 자미원(紫微垣)이라고 칭했다. 자금성이라는 이름은 지상의 자미원임을 가리키는 ‘자궁(紫宮)’과 일반인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는 구역 ‘금지(禁地)’가 합쳐진 ‘자궁금지’를 ‘자금’이라 줄여 부른데서 연유했다. 이미 송대의 문헌에도 ‘자금’이 궁중이라는 의미로 쓰인 예가 보인다. 예로부터 중국에는 왕조 교체에 관한 ‘역성혁명(易姓革命)’이라는 사상이 있다. 천자가 되는 건 하늘의 명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천자에게 덕이 없으면 그 명은 다른 사람에게 주어진다. 즉 천명이 바뀌어 천자의 성(姓)이 달라진다. 명청 교체로 말하자면 하늘의 명이 ‘주(朱)’에서 애신각라(愛新覺羅)로 이동한 것을 가리킨다. 그 때문에 역대 황제는 하늘과의 관계를 항상 백성에게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명조는 주원장(朱元璋)이 세웠으므로 천자의 성은 ‘주’였다. 청조의 성인 애신각라(愛新覺羅)는 만주어 성 ‘아이신기오로’를 음차 표기한 것이다. 그 하늘과의 관계 역할을 담당한 것이 천안문이다. 명대에는 승천문(承天門)이라 불렀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장소였다. 이 천안문에서 출발해 청대 역사의 흐름을 더듬어 가면서 자금성의 주요 건물군을 찾아가 본다. 일종의 시간 여행이다. 현재 중국의 권력구조에도 이 ‘지상 천궁’의 DNA가 포함되어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나의 개인적인 소견일까 중축선의 서쪽, 무영전(武英殿) 성내를 돌다보면 중축선의 서쪽, 동쪽의 문화전과 대칭적인 위치에 무영전(武英殿)이 있다. 서적과 관련된 공간이라서 더욱 관심이 간다. 1644년 중원의 통치자가 된 섭정자 도르곤이 지배를 선언한 청조의 출발점이자 집무장소다. 그러나 서서히 주요 건물의 수복이 진행된 강희 19년(1680) 이후로 이곳은 서적 편찬 장소가 되었다. 이곳에서 편찬된 도서 목록을 잠시 들여다본다. ‘삼번의 난’에 대한 군공을 찬미한 『평정삼역방략』과 『명사』와 『강희자전』을 필두로, 한어. 만주어. 몽고어. 티베트어에 걸쳐 흔히 전본(殿本)이라 칭해지는 도서의 편집, 인쇄, 간행 등 다민족국가로서의 문화적 통일에 획기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권력의 이면 어느 나라, 어느 시대나 권력은 영원하지 않다. 자연스런 권력 승계보다 암투와 보복이 거듭된다. 중국의 역사에도 그 그늘이 많다. 강희 61년(1722) 11월 13일, 이궁 창춘원에서 사망한 강희제의 유해는 그날 밤 늦게 극비리에 건청궁으로 옮겨졌다. 『청사고』는 죽기 직전 머리맡에 모인 황자들에게 강희제가 넷째 아들 옹친왕을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세 황후에게서 나온 스물다섯명의 황자들 사이에서 제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은 격렬했고 갖가지 소문이 흘러나왔다.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리라. 강희제의 고뇌와 황태자 제도의 위험을 곁에서 보고 들었으며, 자신의 즉위 후에도 여전히 제위를 향한 야망을 버리지 않는 배다른 형제들의 추악한 고집과 갈등 한가운데에 위치했던 옹정제는 ‘비밀건조제’라는 새로운 계승법을 창안했다. 이 제도는 황자들 상호간의 절차탁마를 촉진하는 동시에 황제도 그들의 자질을 관찰할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또 상황에 따라 변경도 할 수 있는, 극히 현실적인 제도라고 할 수 있었다. 시황제 이래의 언론 탄압 지배, 피지배의 역사에서 서적을 소각한 사례는 무척 많다. 잿더미로 사라진 책들이 많다. 책을 정신으로 본 것이다. 책 쓴 사람만 죽여선 답이 안 나오다 보니 책을 없앤다. 정복자는 피정복 민족들이 책을 읽고 생각이 키워지며 행동으로 바뀌는 것이 겁이 나는 것이다. 한족, 특히 한족 지식인은 원래 문자 유희를 즐기는 경향이 있다. 때로는 위정자가 금기시한 문자를 사용해 그들을 비판함으로써 필화(筆禍)를 초래하기도 했다. 이미 고인이 된 저자의 저술은 ‘금서(禁書)’라는 형태의 처분을 받았다. 강희제의 경우, 명조 지배기의 관점에서 입관 이전의 청조를 주변 이민족으로 간주하는 서적이나 명조 멸망 이후 세워진 ‘남명(南明)’을 정통으로 여기는 주장 등을 탄압의 대상으로 삼았다. 건륭제의 경우는 조금 양상이 달랐다. 고대 시황제의 분서갱유(焚書坑儒)이래 최대 규모라는 건륭의 금서는 ‘사고전서’의 편찬이 한창일 때 우발적으로 일어났다. 건륭 37년 정월, 예순두 살의 건륭제는 고금의 책들을 전국적으로 수집했는데 가장 기대했던 문화 중심지 강남의 응모가 적었다. 중국의 전통으로는 당대의 왕조가 전 왕조의 역사를 ‘정사(正史)’로 편찬할 의무가 있다. 청조의 경우에는 그 사료가 되는 것이 명대의 문헌이었고, 거기에는 당연히 현 왕조를 이적시하는 금지된 문장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소장에 대한 죄목을 두려워하거나 명조의 부활을 기대하며 은밀히 책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사로잡힌 건륭제는 강남으로 범위를 좁혀 열다섯 차례에 걸쳐 조서를 발표하고, 그 결과 2,578종 수만 권의 책을 징발한다. 그리고는 ‘
알기 쉬운 체계로 구성한, 깊이 있는 자금성 가이드

자금성(紫禁城)은 중국 북경을 방문하는 이들이 첫손에 꼽을 만큼 중국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엄청난 규모와 화려함으로 보는 이를 압도하는 옛 궁전의 장관은 세계적 문화재로서 일찍이 유네스코 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자금성을 관람하게 된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처음에는 그 대단한 위용에 놀라워하다가도 이내 비슷비슷한 궁전들뿐이네 하며 도중에 흥미를 잃고 실망하는 일이 있다. 관광 안내지가 일러주는 정보만을 갖고 둘러보아서는 파란만장했던 역사의 심장부였던 자금성 곳곳의 다양한 매력과 사연들이 충분히 전해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장대한 역사의 드라마를 품고 있는 자금성을 그 정도로 지나쳐 버린다는 건 무척 아까운 일이다.

이 책은 자금성에 대한 단순건조한 소개를 나열하는 대신 그 안을 차근차근 누비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인문적 가이드서다. 이제는 고궁이 된 자금성에서 관람객의 한걸음 한걸음에 맞추어 각각의 공간들이 어떠한 의미를 담고 조성되었으며 실제로 그 안에서 무슨 일들이 벌어졌는지, 황제를 비롯해 주요한 역사적 인물들은 곳곳에서 어떤 생각을 했고 사건 전개의 동선은 어떠했는지를 어느 해설사의 설명을 통해서보다 흥미진진하게 살필 수 있다.


서문 | 청조 계보도 | 자금성 개략도 프롤로그 ― 권위를 시각화하다 중축선 ― 공간과 시간을 지배하다 | 음양과 숫자 | 지붕 위의 신비한 동물 | 음양오행설에 따른 색채 | 시각화된 위계 1장 청조의 등장 ― 순치제·강희제 도르곤의 입성 | 에치젠의 표류자가 본 자금성 | 이민족 지배의 시작 | 정오, 휘황찬란한 태양의 상징 | 내금수교를 건너 | 숙부 집정과 결혼한 황태후 | 용이 비호하는 태화전 | 태감 제도의 부활 | 인재가 곧 국보다 | 청년 황제의 사랑과 죽음 | 보화전, 소년 황제의 궁전 | 관리 등용의 우회로 | 건청문, 내정이 시작되는 곳 | 건청궁으로 | 선교사들 | 중축선의 동쪽, 문화전 | 중축선의 서쪽, 무영전 | 함안궁, 폐태자의 감옥 2장 융성기로 ― 옹정제·건륭제 즉위를 둘러싼 음모 | 독특한 황위 계승법 | 숙청의 시작 | 500년 만의 기이한 상서 | 궁전은 품격보다 편리성 | 특권은 황제 한 사람의 것 | 밀정의 파견 | 관료 부패에 대한 개혁 | 안경과 애완견 | 문자옥 | 옹정제의 죽음 | 출생의 미스터리 | 교태전 | 기괴한 샤먼 의식 | 신혼 침실 ‘희방’ | 강남 순행과 두 황후의 죽음 | 건축은 권력 과시의 증거 | 시황제 이래의 언론 탄압 | 사고전서 | ‘국가의 융성’ | 백련교도에 대한 저주 3장 내정과 외정의 접점 ― 가경제·도광제 꼭두각시 황제가 사는 육경궁 | 하늘을 나는 지네 | 수뢰와 축재의 구조 | 상서방, 제왕학의 장소 | 전정, 무술의 전당 | 융종문, 경계 엄중한 금문 | 천리교도의 침입 | 아편전쟁의 서곡 | 군기처, 청나라 최고 통수부 | 영관묘에 돈 추문 | 양심전에서의 황제 소견 | 임칙서의 등장 | 아편전쟁의 발발 | 대외 전쟁으로 인한 피폐 | 궁술과 기마의 허망함 4장 ‘여제’가 탄생한 길 ― 함풍제·동치제·광서제 양심전 후전, 황제의 사생활 | 궁녀의 의무 ‘임행’ | 궁녀 선발 | 태평천국의 난 | 애로호 사건에서 제2차 아편전쟁으로 | 황제가 도망간 뒤 | 그때 열하에서는 | 기상정변 | 수렴청정의 시작 | 홍덕전, 동치의 제왕학 | 동치중흥과 양무운동 | 동치제의 결혼 | 광서제 즉위를 둘러싼 속임수 | 아사를 선택한 황후 | 벽화의 미스터리 | 친정 준비 | 광서제의 결혼 | 청일전쟁보다 환갑연 | 황제의 쿠데타 ‘무술변법’ | 광서제와 이토 히로부미의 회견 | 꿈꾼 뒤 5장 후궁 비경 ― 서태후·동태후 다섯 가지 황후 | 자녕궁, 자금성 안의 ‘내세’ | 후궁의 구조 | 저수궁, 박복한 황후와 운 좋은 귀인 | 전통에 대한 도전 | 서태후의 관방 | 금기와 처벌 | 장춘궁의 홍루몽 벽화 | 동육궁의 종수궁 | 태감 안덕해의 죽음 | 동태후의 급사 | 경인궁, 총애받은 남장 비빈 | 후궁의 덫 | 냉궁이라는 이름의 감옥 6장 호화찬란한 사적 공간 ― 건륭상제·서태후 구룡벽 | 자금성의 축소판 | 강남 풍광을 연출하다 | 황제의 식탁 | 태상황제와 여제 | 창음각, 영고성쇠의 연주 무대 | 열시루, 분단된 극장 | 제위를 박탈하려는 모략 | 북경으로 몰려든 의화단 | 진비의 죽음 | 문명의 이름으로 자행한 약탈 | 서태후의 귀환 | 패전 처리 | 러일전쟁의 전쟁터가 되어 | 개혁 시도 7장 황혼의 자금성 ― 선통제 부의 붕괴를 향한 길 | 원세개의 야망 | 공중폭격당하는 자금성 | 수방재, 매란방의 경극 공연 | 건복궁의 화재 | 태감의 세계 | 검은 기와지붕 아래 | 어화원 | 가정교사 존스턴 | 풍옥상의 쿠데타 | 신무문, 청조의 퇴장 에필로그 ― 지상 천궁에서 인민의 박물원으로 아쿠타가와와 노신 | 자금성의 문화재를 둘러싸고 | 청실선후위원회의 노력 | 고궁박물원 개막일 후기 | 참고문헌 | 자금성 관련 연표 | 찾아보기